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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의 법칙뿐만 아니라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五蘊)에 대한 분석에 따르면, 아트만 혹은 영혼, 자아, 자기라는 인간의 안팎에 상주하는 불멸의 본질이 있다는 사상은 거짓된 신념이고, 단지 정신적인 투영일 뿐이다. 이것이 불교의 무아의 가르침이다.
여기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두가지 종류의 진리에 관하여 언급해두어야겠다. 하나는 방편적 진리(俗諦,sammutisacca)이고 다른 하나는 궁극적 진리(眞諦,paramatthasacca)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나 또는 너, 존재, 개인과 같은 표현을 사용할 때에 우리는 세상의 관례대로 방편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진리에는 나 또는 너, 존재, 개인이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에서는 "개인은 가명(假名)에 의해서 있는 것이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불멸하는 자아 또는 아트만을 부정하는 것은 대승불교나 테라바다불교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에서 완전히 일치하는 불교의 전통은 붓다의 근본 가르침과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러나 최근에 불교의 정신과는 아주 모순되게, 붓다의 가르침 속으로 자아의 관념을 끌어들이려는 몇몇 학자들의 헛된 시도가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 학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찬양하고 숭앙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불교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이들은 가장 명철하고 심오한 사상가라고 생각한 붓다가 그들이 바라마지 않았던 아트만, 곧 자아 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영원한 존재 - 소아로서의 작은 자아가 아니라 대아로서의 커다란 자아 - 에 대한 필요 때문에 붓다의 가르침에서 도움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아 또는 아트만의 존재를 믿는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붓다가 자아나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것은 틀린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확실히 광범위한 원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붓다가 결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던 사상을 누구도 불교 속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신이나 불멸의 영혼을 믿는 종교들은 이 두 가지 관념에 대하여 의심의 여지를 갖고 있지 않다. 반대로 그러한 종교들은 가장 웅변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신이나 영혼의 존재를 천명하고 있다. 만약 붓다가 다른 종교에서처럼 이러한 관념을 받아들였다면 다른 사물들에 관하여 언급했던 것처럼 공적으로 그것을 선언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그가 열반에 든 후에 25세기가 지나서야 발견되도록 숨겨져 있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사람들은 붓다가 시설한 무아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들이 상상하고 신중하게 생각했던 소중한 자아가 파괴되려한다는 생각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 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사실을 모른 체 하지는 않았다. 한 수행승이 그에게 "세존이시여, 자아 속에 영원한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고민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붓다는 여기에 대하여 이와 같이 대답했다.
[붓다] "수행승이여, 그렇다. 어떤 사람이 세계는 아트만 바로 그것이다. 나는 죽은 후에 영원하고 상주하고 불변하는 그것이 될 것이며 거기서 영원한 것으로 지속할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는 여래와 그 제자들로부터 사변적인 견해와 선입관, 편견, 집착과 경향을 근절시키고 일체의 형성을 그치고 일체의 취착을 버리고 갈애를 소진시켜 탐욕을 끊고 소멸하는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법을 설하는 것을 듣는다. 그래서 그는 나는 전멸될 것이다. 나는 파괴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통곡하며 가슴을 쥐어뜯고 방황한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자아 가운데 어떤 영원한 것이 발견되지 않으면 사람은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다."
그밖에 붓다는 "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며, 내가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두려운 것이다." 고 말했다. 불교에서 자아의 관념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붓다는 물질(色), 감수(受), 지각(想), 형성(行), 의식(識)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가지 요소의 분석을 통해 그러한 존재 속에서 자아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섯가지의 존재의 다발을 떠나서 인간 내부의 어떤 곳에서든지 전혀 자기를 찾아 볼 수 없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입장은 다음 두 가지의 이유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하나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존재는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로 이루어져 있으며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전에서도 붓다는 존재는 다섯가지의 존재의 다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하나는 붓다는 언제나 우주의 어디에서든지 인간의 안이든 밖이든 간에 아트만, 영혼, 자아,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부정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붓다의 가르침 가운데 극히 중요한 세가지의 경구(三法印)가 있다. 그것은 [법구경] 277, 278, 279의 경구이다. 첫 두 경구에는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다(諸行無常).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괴롭다(諸行皆苦)." 라는 것이며, 세 번째의 경구는 "모든 법은 무아이다(諸法無我)" 라는 말이다.
여기서 첫 두 경구에 조건지어진 것이란 빠알리어로 쌍카라(sankhara)를 말하는데 여기에 주의를 기우려보자. 그리고 세번째에는 법이란 말이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빠알리어로 담마(dhamma), 범어로는 다르마(dharma)를 가르킨다. 왜 세 개의 경구 가운데 앞의 두 개는 쌍카라가 사용되었고 세번째에서는 담마가 사용되었는가?
여기에 모든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쌍카라라는 말은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 모든 조건지어진 것, 상호연관된 것, 상대적인 것, 정신물리적인 사상(事像)이나 상태를 의미한다. 만약 셋째 경구가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아이다" 라고 되어 있다면 사람들은 쌍카라 즉 조건지어진 것이 무아이니까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 곧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 이외의 것은 자아 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법 즉 담마라는 말을 세 번째 구절에서 사용한 것은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불교에서 법 즉 담마란 말은 쌍카라라는 말보다 넓은 의미로 쓰인다. 불교용어 가운데 법이란 말처럼 넓은 의미로 쓰이는 말은 없다. 그것은 조건지어진 것뿐만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열반이란 말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 말속에는 우주 안팎에서의 상대적인 것이나 절대적인 것이나,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조건지어진 것이나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나, 어떠한 것이든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무아이다" 라는 진술은 분명한 것이다.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뿐만 아니라 그것에서 벗어난 어떠한 곳에서도 자아 또는 아트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상좌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중생이나 담마 속에서 자아를 찾을 수가 없다. 대승불교의 경우도 이러한 관점에서 법은 실체가 없다는 사실(法無我) 뿐만 아니라 자아도 실체가 없다는 사실(我無我)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상좌불교와 조금도 차이가 없다. [맛지마니까야]에서 붓다는 제자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붓다] "수행승이여, 그것을 받아들여 슬픔, 고통, 좌절, 재난을 일으키지 않는 영혼설이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여라. 그러나 수행승이여, 그것을 받아들여 슬픔, 고통, 좌절, 재난을 일으키지 않는 영혼설을 보았는가? 세존이시여, 보지 못했습니다 수행승이여, 그러하다. 나도 그것을 받아들여 슬픔, 고통, 좌절, 재난을 일으키지 않는 영혼설을 보지 못했다."
붓다가 받아들인 영혼설(我論)이 있다면, 확실히 그는 여기서 그것을 설명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 영혼론이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수행자에게 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붓다의 견해로는 그러한 영혼론은 없으며 그것이 아무리 미묘하고 숭고하더라도 슬픔, 고통, 좌절, 재난을 일으키고 모든 문제를 야기시키는 거짓이고 환상일 뿐이다. 붓다는 그 [맛지마니까야]에서 이어서 설법을 계속했다.
[붓다] "수행승이여, 자아나 자아를 유지하는 어떤 것을 진실로 확실히 찾을 수 없을 때에 세계는 아트만 바로 그것이다. 나는 죽은 후에 영원하고 상주하고 불변하는 그것이 될 것이며 거기서 영원한 것으로 지속할 것이다 고 생각하는 견해는 완전히 어리석은 견해가 아닌가?"
그래서 붓다는 아트만, 영혼, 자아는 진실로 어디에서든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것이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붓다의 가르침에서 자아 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잘못 해석되거나 번역된 몇가지 경구를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예들 가운데 하나가 법구경에 등장하는 앗따 히 아따노 나토(atta hi attano natho)" 란 말이 있는데 "자기가 자기 자신의 안식처이다" 라는 뜻이다. 어느 학자는 이것을 "대아는 소아의 주인이다" 라고 번역을 했다. 무엇보다도 이 번역은 잘못되었다.
여기서 앗따(범어에서는 아트만)라는 말은 영혼이라는 의미를 지닌 자아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빠알리어에서 자아는 일반적으로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특별히 철학적으로 영혼론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고는 단지 재귀대명사나 부정대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 경구가 있는 법구경이나 다른 많은 경전에서 일반적으로 그 말은 나 자신 너 자신 그 사람 사람 우리 자신 등의 뜻으로 쓰인다. 다음에 나타 라는 말은 주인 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처 보호처 도움 보호 등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앗따 히 앗따노 나토란 말은 자기는 자기 자신의 안식처이다 라는 말이다. 여기에 형이상학적인 영혼이나 자아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단지 너 자신은 너 자신에게 의지할 것이지 다른 어떠한 것에도 의지하지 말라는 뜻이다. |